중앙아시아 1
7월 23일(금) 인천 → 타쉬켄트(우즈베키스탄)
우즈베키스탄
◈ 수 도 : 타쉬켄트(Tashkent), 인구 230만(2006년 기준)
◈ 인 구 : 2,730만명(2006년 기준) ◈ 면 적 : 447,400㎢
◈ 주요도시 : Tashkent(타슈켄트:230만명), Samarkant(사마르칸트:39만명),
Bukhara(부하라:23만명), Fergana(페르가나:20만)
◈ 주요민족 : 우즈벡인(68.7%), 러시아인(10%), 카자흐인(4.0%), 타지크인(3.9%)
◈ 주요언어 : 우즈벡어(공식어), 러시아어
◈ 종 교 : 이슬람교(90%, 수니파), 그리스 정교 ◈ 화폐단위 : 숨(Sum)
◈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속국이 되었으며 1924년 10월 소련의 일원으로 우즈베크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을수립하였다. 1991년 9월 완전 독립하였고 독립국가연합(CIS)에 가입하였다. 125개 민족이 공존하는 다민족국가이며, 국명은 '우즈베크인(人)의 나라'라는 뜻의 페르시아어(語)에서 유래했다
타슈켄트(Tashkent)
타슈켄트는 우즈벡어로 '돌(Tosh)의 도시(Kent)'라는 뜻으로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이며 중앙아시아 최대의 도시로서 교육과 학술, 예술, 과학, 공업, 교통의 중심지로 현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곳이다.
기원전 2세기까지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무구한 역사를 가진 오아시스의 도시이다. 타슈켄트의 기원은 기원 천년간의 태동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11세기에 "돌의 도시"라는 의미의 도시명을 갖게 됨으로서 근대 수도로써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도시는 아득한 옛날 대상이 황래하던 실크로드의 정취가 남아 있는 구시가지와 복잡한 변화의 과정과 평화로움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신시가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슬람교의 본부가 위치하고 있다.
현재 인구 211만명(1997년 현재)의 타슈켄트는 치르치크강(Chirchiq River)부근, 목화와 과실나무가 잘 자라는 오아시스에 위치하고 있으며, 우즈베키스탄 문화의 중심이면서 공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중앙아시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또한, 우즈벡과학대학 등 19개의 대학과 20개의 도서관과 같은 수많은 교육기관이 자리잡고 있는 우즈베키스탄 교육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타슈켄트가 현대적인 도시로 발전하게 된 것은 뜻밖에도 자연 재해 때문이었다. 1966년 4월 26일 새벽 5시23분, 타슈켄트를 덮친 진도 8의 엄청난 지진이 도시의 대부분을 파괴했다. 구 소련은 폐허가 된 이 도시를 집중적으로 복구해 3년이 지난 뒤엔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도시를 만들었다. 그 이후 타슈켄트는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지하철이 달리고 있는 근대도시가 되었다.
6시간 15분의 비행시간 동안 앞의 2줄에 앉은 네 남자들의 수다 - 동네의 평상에 앉아 얘기하는 것처럼 잠도 자지 않고 계속되는 수다에 잠을 잘 수 없어 너무 너무 피곤 하였음. |
7월 24일(토) 타쉬켄트 → 사마르칸트
사마르칸트로 이동(300Km-약 4시간 소요)
사마르칸트(Samarkand)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인 사마르칸트는 2,5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중앙아시아 최고(最古)의 도시인 동시에 중앙아시아의 진주라 불리는 아름다운 지역이다. 유럽과 아시아로 연결되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지리적 요건때문에 많은 이민족의 침략을 받아왔다. 현재 사마르칸트는 37만명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도시로, 사마르칸트 주변지역에서 재배되는 농산물 교역의 중심지이고, 도시 어느곳을 둘러봐도 고대 유적과 유물이 가득한 아름다움과 위엄이 느껴지는 멋진 관광지이기도 하다.
기원전 2세기 중국 실크 상인들이 서양으로 실크를 판매하려고 이용하던 육로 - 그들로 인해 실크로드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 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던 사마르칸트는 유럽과 동양을 연결하는 바닷길이 열리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주요 무역도시였다. 3,4세기 아프라샤프에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해 마을을 영위하고 생활했을 때부터 이곳은 고대 그리스에 마라칸다라(Marakanda)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지금은 폐허가 되기는 했지만 그 유적이 아프라샤프 언덕에 남아있다. BC 4세기 초에 알렉산더 대왕이 사마르칸트를 점령했는데, 그로 인해 동서양의 문화가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7세기초 아랍인들의 군대가 침입했고, 그들은 사마르칸트를 바그다드와 중국 사이를 오가는 상단의 교역지로 번영했고,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1220년 징기스칸의 침입으로 사마르칸트는 완전히 파괴되어 번영과 영광의 빛을 잃게 되었다. 14세기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티무르 왕이 사마르칸트를 티무르 왕조의 수도로 정하면서 다시 한번 찬란한 영광의 빛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티무르 왕이 통치했던 35년 동안 그는 자신이 정복한 도시에서 이름난 건축가들을 사마르칸트로 불러들여 세계 제일의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었고, 그의 후계자들 또한 그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 지금 멋진 유적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마르칸트는 15세기까지 티무르 왕조와 함께 번영을 누렸다.
1868년 러시아 군대의 침략으로 러시아의 종속국이 되었고, 1925년부터 1930년 타슈켄트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우즈벡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였다.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해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이 되었다.
◆ 구르 에미르 영묘
티무르의 무덤. ''구르''는 묘, ''아미르''는 지배자라는 뜻으로 구르에 아미르는 ‘지배자의 묘’를 뜻한다. 1403~1404년 티무르가 자신이 아끼던 손자 무함마드 술탄이 이란에서 죽은 것을 추도하기 위해 지었다. 티무르 자신도 1405년 명나라를 정벌하려고 떠났다가 오트라르에서 병사하여 이곳에 묻혔다. 티무르의 관은 연흑색의 돌널무덤으로 손자 무함마드 술탄과 아들 샤로흐, 샤로흐의 아들 울루그 베그와 티무르의 스승의 관과 함께 있다. 그러나 실제 관은 4m 아래 지하에 매장되어 있다.
건물 외관은 코란 문구로 장식되어 있고 푸른 색 돔은 티무르 시대의 풍조대로 64개의 나무로 보강되고 푸른 타일이 세로로 붙여져 있다. 내부에서 보는 돔의 천장은 금색, 청색으로 채색된 이슬람 문양으로 장식되어 아름답다. 1941년 구 소련의 고고학위원회에서 발굴하여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묘의 발굴로 티무르가 전쟁에서 다쳐 다리가 부자유스런 장애로 살았다는 것과 그의 손자인 울루그베그가 머리를 잘려 죽었다는 설이 사실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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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기스탄 광장 (Registan square)
사마르칸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이다. '레기'는 모래, '스탄'은 광장의 뜻으로 레기스탄은 ‘모래 광장’을 뜻한다. 북쪽을 흐르는 운하 주변에 있는 모래땅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공공의 광장으로 왕의 알현식, 공공집회, 죄인의 처형 등이 행해졌다. 티무르 시대에는 대규모 노천시장이 있었으며, 그의 후손인 울루그벡 시대에 처음으로 메드라사가 세워졌으며 메드라사의 맞은편에 하나카가 있었다. 광장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가진 것은 그 후 샤이바니 왕조의 야한그도슈 바하도르에 의해 다른 2개의 메드라사가 건립된 이후이다. 3개의 메드라사가 건립된 이후 레기스탄 광장은 이슬람 교육의 중심지로써 명성이 자자하였으며, 그후 구소련 시절에는 이슬람 종교의 탄압으로 다시 거대한 노천시장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이슬람 교육의 장소도 아니고, 노천시장도 아닌 관광지로써 역할을 하고 있다. 레기스탄광장 안에는 3개의 메드레세가 있다.광장 왼쪽에 위치한 건물이 울루그벡 메드라사, 중간이 틸라카리 메드라사, 오른쪽이 쉬르도르 메드라사이다.
※ 마드라사(madrassah - 신학교) 이슬람 신학을 비롯해 철학, 천문학, 역사, 수학, 음악등을 가르친 종합 교육기관이다
♠ 울루그벡 메드레세 Registan Ulugobek Medressa
레기스탄 광장의 왼쪽에 위치하고 있는 울루그벡 메드레세는 1420년 울루그벡에 의해 세워졌으며, 레기스탄 광장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울루그벡은 왕이자 학자로써 이름을 떨쳤는데 직접 이슬람 신학에서 수학, 철학까지 강의했었다. 울루그벡 메드레세는 그 시대 학문의 중심지로써 약 100명의 학생들이 생활을 하며 공부했었다. 처음에는 신학교로 출발했으나 후에는 천문학, 철학, 수학, 과학 등의 연구소로도 이용되었다. 천문학자로써 유명한 울루그벡을 상징하듯 외관의 문양은 하늘의 푸른 별을 형상화하였다.
♠ 틸라카리 메드라사
광장에 정면으로 보이는 메드레세로 1647년 쉬르도르 메드레세를 세운 야한그도슈 바하도르에 의해 급히 세워진 메드레세이다. 쉬르도르 메드레세가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문양으로 표현을 했기 때문에 수 많은 무슬림들의 불만을 샀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을 무마시키기 위해 전통적인 양식으로 더욱더 화려하게 이 메드레세를 건축하였다. 틸라카리는 ‘금박으로 된’이라는 뜻으로 메드레세 안으로 들어가 좌측편 푸른돔 아래의 예배당을 보면 그 이름이 어울림을 알 수 있다. 벽면과 천장을 모두 금빛으로 장식을 하여 화려하기 그지없다. 천장의 돔 모양을 보면 둥글게 보이나, 사실은 푸른색 부분부터는 세밀한 표현으로 둥글게 보일 뿐 사실은 평면이다.
♠ 시르도르 마드라사 Shir Dor Madrassah
이 건물은 1619년과 1636년 사이에 얄랑투시 바하두르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의 건축가들은 울르그벡 신학교의 규모와 고귀함에 걸맞는 건물을 지으려 했지만, 쿠란에서는 좌우대칭을 금지하였기에, 똑같은 형태로 지을 수는 없었다. 울르그벡 신학교와의 차이점은 모스크가 없고, 뒤쪽에 다르스호나(학생들의 방)가 있으며, 측면에 보조 입구가 있다는 점이다.외벽은 풍부한 색채의 기하학적인 꽃무늬와 문자들로 덮여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정면 아치 위쪽에 표현되어 있는 사자의 형상이다. 쉬르도르는 ‘사자가 그려졌다’라는 뜻으로 입구 아치에는 어린 사슴을 쫓는 사자(사자보다는 호랑이에 훨씬 가깝다)의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건물 명칭 (시르도르)은 바로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사자 뒤로는 부하라의 나지라 지반베기 메드레세의 것과 같은 사람얼굴 형상의 태양도 그려져 있다. 본래 이슬람교는 우상숭배를 금지하기 때문에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을 표현하지 않지만, 간혹 그 시대의 왕이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금령을 깨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 사자가 얄랑투시를 상징한다고 보는 사람도 있으며, 동물과 태양의 묘사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남아있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200숨짜리 지폐에 그림이 나온다.
※ 사자는 학생을 사슴은 학문, 과학을 의미한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