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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해외여행

이란 - 비샤푸르, 초가잔빌, 수사(슈슈)

1월 15일 - 비샤푸르

비샤푸르

이란 남부 파르스 지방 카제룬의 북쪽 약 20 km에 있으며, 프랑스 고고학조사단의 발굴로 조로아스터교 신전, 봉헌비, 궁전 터 등이 확인되었고, 출토된 비문에 의하여 샤푸르 1세가 266년 창건한 도시로 판명되었다.

♦ 사사니안 왕조의 샤푸르왕궁과 아니히타 사원, 샤푸르 왕이 로마황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포로로 잡은 군인 8,000명과 함께 이곳에 머물게 하면서 궁전을 지었다고 한다. 이 도시는 바둑판 모양의 직사각형 플랜을 따라 성벽과 도랑을 두르고, 언덕에는 요새를 구축하였으며, 전체 건축은 페르시아 형식 및 기술로 건축하였고. 궁전에 남아있는 모자이크 벽화에는 시리아 로마 미술이다. 궁전 바닥을 장식했던 모자이크 타일은 테헤란, 영국의 박물관에 몽땅 겨지고, 남은 것은 돌 벽뿐이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돌덩어리들로 그 엄청난 규모를 짐작할 뿐이었다.







탕계초간 도성 서쪽의 드이샤푸르의 협로(峽路) 강물 따라 좁은 통로를 걸어가면 왼쪽 언덕 높이 암벽탕게 초간 벽에 새겨진 부조에 거대한 부조 넷이 있다. 샤푸르 1세가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사로잡은 전승도를 비롯하여, 사산왕조 제왕의 마애부조(磨崖浮彫)가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었다. 입구에서부터의 부조물들은 샤프르의 군사와 말들( 희미하게 보인다 ), 샤프란 1세, 바흐람 1세가 아흐라 마스다에게 신권을 부여받는 장면. 바흐람 2세에게 존경의 예를 드리는 손 모양을 한 병사들의 모습 순서로 있다




1월 16일 - 초가잔빌, 수사(슈슈)


초가잔빌 [Tchogha Zanbil]

이란 후제스탄주에 있는 고대도시 유적지로 BC 13세기 중반 엘람 왕국의 왕 운타시 갈( Untash Gal: BC 1250경 재위)이 건설한 도시이다. 수도인 수사 남쪽에 있으며 당시에는 '두르운타시'라고 불렸다.

고대 이란 땅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산을 신성시 했었다. 하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산이 없어서 산의 형상을 만든 것이 이 초가잔빌의 지구랏트로 알려져 있다. 1979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BC 640년 무렵 아시리아의 침입으로 수사와 함께 파괴되었으나 1935년 유전탐사로 인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도시는 2중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외벽 총길이는 약 4km이고 안쪽에는 내벽이 둘러쳐져 있다. 유적 중앙에 있는 지구라트는 서아시아 최고의 규모로서 현재 높이 28m이다. 초가잔빌은 원래 5층이였으나 현재 3층까지만 남아있으며 원래 높이는 60미터로 추정되나 현재는 25미터이다. 밑면은 한 변의 길이가 102미터인 정사각형 모양이다. 4모퉁이가 동서남북을 정확하게 가리킨다. 안쪽으로 밧줄이 쳐져 있는 것이 출입이 제한되는 듯싶은데 안내인의 안내를 받으며 궁궐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안내인은 나중에 돈을 달라고 하였음) 이곳에는 성탑 지구라트, 신전, 안뜰, 무기와 장식품을 보관하는 창고 등이 세워져 있었고 1m가 넘는 성벽두께와 거기에 문을 달았던 돌쩌귀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지구라트 북서쪽 벽으로 둘러싸인 사각 모양의 공간에는 남신 이슈니칼랍나피리샤와 여신 키리리샤를 모신 3개의 신전이 있다. 각 신전에는 안뜰 지성소, 공물보관소 등이 설치되어 있다. 건물 기단은 불에 구워 만든 벽돌, 건물 위쪽은 햇볕에 말린 벽돌로 지었으며 벽에는 엘람어로 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사방 네 군데의 출입문이 있는데, 성 바깥쪽으로 도자기를 구웠던 터, 교수형을 처하던 곳, 마구간, 해시계의 유적 등이 남아 있었다.





수사 (슈슈)

아르키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왕의 첫 번째 왕궁이 있는 고대 도시. 선사시대에서 페르시아 제국에 이르기까지 이란문명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이었던 도시. 현재는 '슈슈(Shush)'라고 불린다. BC 4000년 무렵부터 엘람 민족이 거주, 신석기문화를 이룩하여 예술적인 가지무늬토기[彩文土器] 등을 남겼다. BC 3000년대 초기 원(原)엘람문자와 십진법이 발명되었고 도시도 성립하였다. 지리적으로 메소포타미아에 연속되어 있어 문화적인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설형문자(楔形文字)나 십이진법 등이 채용되었다. 아시리아 시대 아슈르반아플리 왕에게 멸망당하였으나, 페르시아제국 시대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의 다리우스가 이 곳에 도읍하여 장대한 궁전을 만들고, 도시 전체를 성새(城塞)로 두른 이후 크게 번영하였다. 상업도시로서 사산왕조 페르시아 시대까지 존속하였고, 알렉산드로스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벌한 후에도 서방과의 밀접한 교섭을 나타내는 화폐 등이 발굴되었다. 또한 4세기에는 국왕의 탄압에 대항하는 그리스도교도의 반란으로 코끼리군(軍)에게 짓밟혔으나, 중국의 도기(陶器), 투르크의 화폐가 발견되어 8∼10세기에는 동서문화 교류에 큰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몽골군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었다.

<왕궁 터 >



다니엘의 무덤


<폴덕다리 >사산조시대의 다리


<물래방아 >